리하르트 파이퍼의 내독소 실험: 세균 사멸이 독성을 유발함을 증명하다
발행: 2026-01-15 · 최종 업데이트: 2026-01-15
리하르트 파이퍼는 1892년 실험을 통해 세균이 죽는 과정에서 방출되는 독성 물질, 내독소의 존재를 처음으로 규명했다.
LPS 라는 물질이 현대 면역학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지만, 그 시작은 아주 사소했습니다. LPS는 워낙 극미량이 강한 염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당연히 초기에는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다만 이 물질은 뭔지는 모르지만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물질로 생각되었습니다.
연구 환경: 코흐의 제국위생연구소와 파이퍼
19세기 말 독일 제국의 베를린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균학 연구기관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제국위생연구소입니다. 이 연구소는 결핵균을 발견한 로베르트 코흐가 이끌고 있었으며, 젊은 연구자들에게 실험 설계의 엄격함과 병원체 중심 사고를 철저히 요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리하르트 파이퍼는 이 연구소의 핵심 구성원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코흐의 사위로서 학문적·일상적 관계 모두에서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파이퍼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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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성은 관찰이 아니라 실험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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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의 역할은 생존 여부가 아니라 작용 기전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파이퍼의 내독소 실험은 바로 이 환경에서 출발했습니다.
문제 설정: 세균을 죽이면 병원성도 사라지는가
19세기 말 세균학의 기본 전제는 명확했습니다. 병은 살아 있는 세균이 증식하면서 발생하며, 세균을 제거하면 병도 소멸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리하르트 파이퍼는 이 전제를 실험적으로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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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원인은 살아 있는 세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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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세균이 남긴 어떤 물질인가
이 질문은 곧 실험 설계로 이어졌습니다.
실험 1: 살아 있는 콜레라균과 사멸된 콜레라균의 비교
파이퍼는 콜레라균을 이용해 다음과 같은 비교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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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동물에 살아 있는 콜레라균을 주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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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실험군에는 가열 또는 여과로 사멸시킨 콜레라균을 동일한 양으로 주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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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군에서 나타나는 임상 증상을 비교 관찰합니다.
예상과 달리, 사멸된 콜레라균을 주입한 동물에서도
발열, 무기력, 순환 장애가 관찰되었고 일부는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 결과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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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의 생존 여부와 무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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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잔해 자체가 강한 병원성을 지닐 수 있다
실험 해석: 독은 분비물이 아니라 구조물이다
당시 알려진 독성 개념은 대부분 외독소(exotoxin)에 기반해 있었습니다.
외독소는 세균이 살아 있는 동안 분비하는 단백질 독소입니다.
그러나 파이퍼의 실험 결과는 이 정의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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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은 배양액 상등액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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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세포 자체에 남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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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이 파괴될 때 더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파이퍼는 이 독성을 내독소(endotoxin)라 명명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세균의 독성은 분비물이 아니라 세균의 구성 요소에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병원성 개념은 “살아 있는 세균”에서 “세균의 물질적 구성”으로 확장됩니다.
실험 2: 면역 동물에서의 파이퍼 현상
파이퍼는 면역 반응이 이 독성 방출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도 조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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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균에 면역된 동물의 복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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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균을 주입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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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강액을 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세균은 항체와 보체의 작용으로 빠르게 용해되며 점액성 잔해로 사라졌습니다.
이 현상은 이후 파이퍼 현상(Pfeiffer’s phenomenon)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파이퍼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추가로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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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용해가 빠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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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증상은 오히려 더 심해질 수 있다
즉, 면역 반응 자체가 독성 물질의 방출을 촉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미해결 문제: 내독소의 화학적 본질
파이퍼는 내독소의 생리적 특성을 정확히 기술했지만,
그 화학적 정체까지는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확인한 사실은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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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독소는 열에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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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 외독소와 성질이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단백질인지, 당인지, 지질인지는 당시 기술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60년 가까이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됩니다.
베스트팔과 뤼더리츠: 내독소의 실체 규명
1950년대 초, 오토 베스트팔과
오스카 뤼더리츠는 이 문제를 다시 다룹니다.
그들은 그람음성균의 세포벽을 페놀–수 추출법으로 처리해
새로운 복합체를 분리했습니다. 이 물질이 바로 리포폴리사카라이드(lipopolysaccharide, LPS)였습니다.
LPS는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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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항원(O-antigen): 면역 특이성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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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 oligosaccharide: 구조적 연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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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 A(Lipid A): 생리적 독성의 중심
1954년 논문에서 그들은 지질 A가 발열과 쇼크를 유발하는 핵심 독성 단위임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이로써 파이퍼가 관찰했던 내독소는
구조적으로 세균 외막의 LPS로 규정됩니다.
과학사적 의미
파이퍼의 실험은 면역학에 세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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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사멸이 곧 염증 반응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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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을 “분비”가 아닌 “구조”의 문제로 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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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혈증, 발열 반응, 선천면역 연구의 이론적 출발점 제공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 LPS의 수용체가 TLR4–MD2 복합체임이 밝혀지며,
파이퍼의 실험은 분자 수준에서 완성됩니다.
정리
1892년 파이퍼는 하나의 단순한 실험을 통해
“세균을 죽이면 안전해진다”는 통념을 무너뜨렸습니다.
면역은 적을 제거하는 행위인 동시에,
그 제거 과정에서 새로운 생리 반응을 유발하는 이중적 시스템입니다.
내독소의 발견은 면역학을
살아 있는 적과의 싸움에서
죽은 물질과의 상호작용으로 확장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