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 예르네의 자연선택 이론: 항원은 항체를 만들게 하는가, 고르는가
발행: 2026-04-20 · 최종 업데이트: 2026-04-20
Niels K. Jerne의 1955년 PNAS 논문을 중심으로, 항체 형성 이론이 instruction model에서 selection model로 이동하는 과정을 정리합니다.
이 논문이 겨냥한 문제
1950년대 초 항체 형성 이론의 중심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항체는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항원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당시의 유력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antigen-template theory였습니다. 항원이 항체 단백질의 일부를 직접 접히게 하거나 배열하게 해서, 자기에게 맞는 항체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입니다. Jerne은 이 흐름 안에 Breinl, Haurowitz, Mudd, Alexander, Pauling의 이름을 놓았습니다.
또 다른 설명은 Burnet과 Fenner의 modified-enzyme theory였습니다. 이 이론은 항체 형성을 미생물의 adaptive enzyme 형성과 비슷한 현상으로 보려 했습니다. 항원이 세포 안의 어떤 효소적 단위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단위가 다시 복제되며, 혈중 항체는 그 변형된 단위의 부분적 복제품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설명은 항원이 사라진 뒤에도 항체 생산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을 template theory보다 쉽게 다룰 수 있었습니다.
Jerne은 두 설명 모두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항원이 항체를 새로 "만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혈액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globulin 가운데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항체 특이성이 항원에 의해 새로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미리 낮은 수준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항체 가운데 항원과 맞는 것이 선택되고, 그 선택된 항체의 생산 증가가 뒤따른다는 이론입니다.
선택이라는 발상
Jerne의 핵심 문장은 분명합니다. 항원은 template도 아니고 enzyme modifier도 아닙니다. 항원은 자발적으로 순환하고 있던 항체를, 그 항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세포계로 운반하는 selective carrier입니다.
이 말에는 몇 가지 강한 가정이 들어 있습니다. 동물의 혈액에는 이미 매우 다양한 globulin 분자가 낮은 농도로 존재합니다. 그중 일부는 아직 항원을 만난 적이 없어도 특정 항원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Jerne은 이런 분자들을 자연 항체, 즉 natural antibodies로 보았습니다. 항원이 들어오면 그 표면에 맞는 globulin 분자가 붙고, 항원은 그 분자들을 phagocytic cell이나 다른 항체 생산계로 가져갑니다. 항원이 제 역할을 끝내고 제거된 뒤에도, 세포 안으로 들어간 선택된 globulin 분자가 같은 종류의 항체 생산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모델입니다.
Jerne의 논문에서 자연 항체는 항원 노출 뒤에 새로 생긴 산물이 아니라, 항원 노출 전부터 정상 혈청 속에 낮은 수준으로 존재하는 항체성 globulin입니다. 이 선재 다양성이 있어야 항원이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델은 현대의 clonal selection theory와 같지 않습니다. Jerne의 선택 단위는 림프구 클론이 아니라 주로 순환하는 항체 분자였습니다. 항체를 만드는 세포가 고유한 특이성을 미리 갖고 있고, 항원이 그 세포 클론을 선택해 증식시킨다는 Burnet식 설명까지는 아직 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논문은 결정적이었습니다. 항체 다양성의 설명을 항원의 instruction에서 면역계 내부의 선재 다양성과 선택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후대 이론은 바로 이 방향을 세포 수준으로 재해석하게 됩니다.
예르네가 설명하려 한 현상들
Jerne의 논문은 추상적인 철학만 제시한 글이 아닙니다. 그는 Burnet과 Fenner가 antigen-template theory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았던 현상들을 하나씩 가져와, 자신의 자연선택설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 주려 했습니다.
가장 먼저 다룬 것은 booster effect였습니다. 같은 항원을 두 번째로 주입하면 1차 반응보다 더 빠르고 강한 항체 반응이 일어납니다. Jerne의 설명에서는 첫 주입 뒤에 해당 특이성의 항체가 이미 혈중에 늘어나 있으므로, 두 번째 항원은 더 많은 특정 globulin을 붙잡아 항체 재생산계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반복 면역 후 항체의 성격이 바뀌는 현상입니다. 초기에는 결합력이 낮은 항체가 나오지만, 시간이 지나고 반복 주입이 이루어지면 더 avid한 항체가 우세해집니다. Jerne은 이를 자연선택의 결과로 해석했습니다. 항원 표면에 더 잘 맞는 globulin이 더 잘 선택되고, 그 결과 다음 반응에서는 더 잘 맞는 항체가 더 많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affinity maturation과 같은 기전은 아니지만, "더 잘 맞는 항체가 선택된다"는 방향은 매우 중요한 직관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항체량의 급격한 증가였습니다. Jerne은 특정 globulin 분자의 autocatalytic replication과 관련 세포의 증가가 함께 일어나면, 초기 항체 생산의 지수적 상승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네 번째는 항원이 제거된 뒤에도 항체 생산이 오래 지속되는 현상이었습니다. template theory에서는 항원이 계속 남아 있어야 설명이 쉬웠지만, Jerne의 모델에서는 항원이 선택된 항체를 생산계로 데려간 순간 이미 역할을 끝낸 것이 됩니다.
다섯 번째는 particulate antigen의 표면이 항체 특이성을 지배한다는 관찰이었습니다. Jerne은 Avery와 Neil의 pneumococcus 연구, White의 Salmonella 연구, Henle의 spermatozoa 연구, Morgan의 Shigella 항원 연구를 언급하며, 실제 항체 반응이 입자의 내부 물질보다 표면 구조를 향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항원이 혈중에서 먼저 만나는 것은 표면이고, 따라서 선택되는 globulin도 그 표면에 붙을 수 있는 분자라는 설명입니다.
에를리히와 버넷 사이의 다리
Jerne의 자연선택 이론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1900년 Ehrlich의 side-chain theory에는 이미 세포 표면 receptor와 선택적 결합이라는 직관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만 Ehrlich는 receptor가 과잉 생산되어 떨어져 나와 항체가 된다고 보았고, 유전자나 림프구 클론의 수준까지는 갈 수 없었습니다.
Jerne은 이 선택의 직관을 혈청 항체 수준에서 다시 살렸습니다. 항원은 항체의 모양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 가운데 맞는 것을 고르는 선택자입니다. 그리고 1957년 Burnet은 이 선택의 단위를 항체 분자에서 림프구 클론으로 옮깁니다. 그 순간 현대적 clonal selection theory가 성립합니다.
Jerne의 논문에는 자기 반응성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추론도 들어 있습니다. 그는 몸 안에서 자기 구조에 붙는 globulin이 생기더라도, 그런 분자는 자기 항원에 붙어 제거되기 때문에 재생산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혈중에는 자기 항원에 대한 특이성이 결여되고, 나중에 같은 종류의 항원 자극이 와도 반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오늘날의 central tolerance나 deletion 개념과 같지는 않지만, 자기 반응성 특이성이 선택 과정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발상은 이후 면역관용 논의와 연결됩니다.
또한 Jerne은 큰 hapten 투여가 뒤이은 항체 반응을 막는 immunological paralysis도 같은 틀로 해석했습니다. 충분히 많은 hapten이 혈중의 특정 globulin을 먼저 제거해 버리면, 뒤따르는 항원은 선택할 항체를 찾지 못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현대적 기전으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항체 반응의 크기를 항원 자체보다 "선택 가능한 선재 항체의 농도"와 연결했다는 점에서 그의 모델을 잘 보여 줍니다.
무엇이 아직 부족했는가
Jerne의 모델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선택된 항체가 어떻게 항체 생산 세포 안에서 같은 항체 생산을 유도하는가였습니다. 그는 RNA와 단백질 합성에 관한 당시의 추측을 끌어와, 세포 안으로 들어간 항체 분자가 특정 RNA 합성이나 단백질 구조 복제를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항체 분자가 세포 안으로 들어가 같은 항체를 만들게 한다는 설명은 맞지 않습니다. 항체 특이성은 B세포 수용체와 면역글로불린 유전자 재배열을 통해 세포 수준에서 결정됩니다.
또한 자기와 비자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왜 자기 항체 생산이 통제되는가, 기억 반응이 세포 집단의 확장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같은 문제도 Jerne의 1955년 논문만으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Burnet의 클론선택설과 면역관용 연구, 그리고 Nossal-Lederberg의 단일세포 실험을 거치며 더 분명해집니다.
그런데도 왜 중요한가
이 논문은 틀린 부분이 있는 이론이지만, 질문의 방향을 바꾼 이론입니다. 항체가 항원에 의해 새로 맞춤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면역계가 이미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항원이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사고방식은 이후 면역학 전체의 중심 언어가 됩니다.
이후 Burnet은 선택의 단위를 항체 분자에서 림프구 클론으로 옮겼고, Nossal과 Lederberg는 하나의 항체 형성 세포가 하나의 특이성만 만든다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Tonegawa는 항체 다양성이 유전자 재배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긴 흐름 안에서 Jerne의 1955년 논문은 "선택"이라는 방향 전환의 이론적 출발점으로 자리합니다.
한 줄 정리
Jerne의 1955년 자연선택 이론은 항원이 항체를 직접 설계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미 존재하는 항체 다양성 가운데 맞는 것이 선택된다는 방향으로 항체 형성 이론을 돌려놓았습니다.
참고문헌
- Jerne NK. The Natural-Selection Theory of Antibody Formati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955;41(11):849-857. https://doi.org/10.1073/pnas.41.11.849
- Burnet FM. A Modification of Jerne's Theory of Antibody Production Using the Concept of Clonal Selection. Australian Journal of Science. 1957;20:67-69.
- Nossal GJV, Lederberg J. Antibody Production by Single Cells. Nature. 1958;181:1419-1420. https://doi.org/10.1038/1811419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