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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근치수술은 어떻게 표준이 되었는가

발행: 2025-12-21 · 최종 업데이트: 2025-12-21

근치적 유방절제술의 탄생과 확산, 그리고 그 과학적 한계

유방암 치료의 출발점, 근치수술이라는 선택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유방암 치료의 오랜 역사는 “가능한 한 많이 제거한다”는 단순한 원칙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원칙을 가장 극단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정식화한 것이 바로 근치적 유방절제술(radical mastectomy)입니다. 이 수술법은 20세기 중반까지 약 70년 이상 유방암 치료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패러다임의 중심에는 미국 외과의학의 상징적 인물인 윌리엄 스튜어트 홀스테드가 있습니다.

윌리엄 스튜워트 홀스테드
그림 1. 윌리엄 스튜워드 홀스테드, 근치 수술의 창시자.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홀스테드와 근대 외과의학의 형성

홀스테드는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활동하며 무균 수술의 개념을 미국에 정착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배운 근대적 외과 기법을 바탕으로 외과 수련 과정을 제도화했고, 오늘날 외과 전문의 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894년 발표한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홀스테드는 유방암 환자에게 시행한 근치적 유방절제술의 결과를 보고하며, 광범위한 절제가 재발을 줄이고 생존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근치수술은 다음 세 가지를 동시에 제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유방 전체 절제(total mastectomy)

  • 대흉근과 소흉근 절제

  • 겨드랑이 림프절 광범위 절제(axillary lymph node dissection)

근치 수술
그림 2. 근치 수술 관련 논문의 삽화, 사진 출처 : Wellcome Collection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는 매우 공격적인 수술이었지만, “암은 국소 질환이며 완전히 제거하면 치료된다”는 인식과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근치수술이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의학은 암을 주로 국소 병변(local disease)으로 이해했습니다. 암이 퍼진다는 개념은 막연하게 존재했지만, 이를 입증할 진단 기술도, 생물학적 설명도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수술의 실패, 즉 재발은 “충분히 많이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해석되기 쉬웠습니다.

이 사고방식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1860년대 영국에서 활동한 외과의사 찰스 무어는 유방암 수술 후 재발이 주로 절제 부위의 가장자리에서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를 근거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암 조직이 주변에 남아 있다”고 추론했습니다. 이 생각은 이후 외과의사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홀스테드는 이를 이론적으로 가장 완벽한 형태로 밀어붙였습니다.

즉, 근치수술은 비과학적 광기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으로 보였던 선택이었습니다.

심각한 후유증과 삶의 질 문제

그러나 근치적 유방절제술은 환자에게 막대한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대흉근이 제거되면 어깨가 안쪽으로 말리며 팔의 움직임이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겨드랑이 림프절을 광범위하게 제거한 환자들 중 상당수는 림프 순환 장애로 인해 팔이 심하게 붓는 림프부종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워졌고, 외형 변화로 인한 심리적 고통도 컸습니다. 당시 외과의학 문헌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수술 후 코끼리 피부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 후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지나 재발하는 사례는 계속 관찰되었습니다.

근치수술의 근거는 얼마나 과학적이었을까

중요한 문제는 근치수술이 오랫동안 과학적 검증 없이 표준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입니다. 홀스테드가 제시한 성과는 무작위 대조군 연구(Randomized Controlled Trial)가 아닌, 선택된 환자군을 관찰한 임상 사례 보고(case series)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외과 수술의 특성상 대조군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으므로 검증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는 점차 교리처럼 굳어졌습니다. 홀스테드라는 인물의 명성과 외과의 권위 자체가 근거를 대신하게 된 셈입니다.

그 결과, “조기 발견 → 광범위 절제 → 생존 연장”이라는 공식은 수십 년 동안 거의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근치수술이 남긴 역사적 의미

돌이켜보면 근치적 유방절제술은 외과의학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수명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점입니다. 생물학적 이해가 발전하고 암의 전신적 특성이 제기된 이후에도, 근치수술은 오랫동안 유일한 정답처럼 유지되었습니다.

이 역사적 경험은 암 치료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치료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질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근치수술의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흔들었던 통계학적 분석과 메타분석 연구, 그리고 미국 항암 연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논문을 다룰 예정입니다.

근치 수술의 역사적 발전 요약

시기(연도)핵심 인물·사건근치 수술에 대한 인식의학사적 의미
1860년대찰스 무어의 국소 재발 관찰재발은 “덜 잘라서” 생긴다광범위 절제 논리의 출발점
1894년윌리엄 스튜어트 홀스테드논문 발표암은 국소 질환이며 완전 제거가 치료근치적 유방절제술의 표준화
1900~1950년대홀스테드 이론의 전 세계 확산“더 많이 자를수록 좋다”외과 중심 암 치료 시대
1950~1960년대기능 손상·재발 문제 누적효과 대비 희생이 크다는 의문근치수술에 대한 첫 균열
1970년대전신 질환 가설 대두암은 이미 퍼져 있을 수 있음근치 논리의 이론적 붕괴 시작
1980년대 이후무작위 대조군 연구 축적수술 범위 ≠ 생존율근치수술 패러다임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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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1. Halsted WS. The Results of Radical Operations for the Cure of Carcinoma of the Breast. Annals of Surgery, 1894.

  2. Mukherjee S. The Emperor of All Maladies: A Biography of Cancer. Scribner, 2010.

  3. Welch HG. Overdiagnosed: Making People Sick in the Pursuit of Health. Beacon Press,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