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셉틴, 항체로 완성된 최초의 표적 항암치료
발행: 2025-12-12 · 최종 업데이트: 2025-12-17
HER2 유전자 발견에서 허셉틴 승인까지, 표적 항체 치료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학과 환자의 역사
허셉틴, 항체로 암을 겨냥하다
허셉틴(Herceptin)은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꾼 대표적인 표적치료제입니다.
특히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에게는 예후를 뒤집은 결정적 약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약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에는 우연한 발견, 집요한 연구, 냉소적인 시선, 그리고 치료를 간절히 원했던 환자들의 목소리가 함께 존재합니다.
허셉틴의 탄생 과정은 현대 정밀의학이 어떻게 현실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HER2 유전자, 암의 성격을 드러내다
198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바이오기업 제넨텍(Genentech)은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활용한 신약 개발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분자생물학자 알렉스 울리히(Axel Ullrich)는 세포 성장 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연구하던 중, 특정 암세포에서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유전자를 발견합니다. 이 유전자가 바로 HER2입니다.
1985년, 울리히 연구팀의 과학자 리사 카우센스(Lisa Coussens)는 HER2 유전자의 복제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이 유전자가 실제 환자의 예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 의문에 결정적인 답을 제시한 인물이 UCLA의 종양내과 전문의 데니스 슬라몬(Dennis J. Slamon) 박사입니다.
그는 HER2 단백질이 과발현된 유방암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재발률이 높고 생존율이 낮다는 사실을 임상 데이터를 통해 입증했습니다. 전체 유방암 환자의 약 20~25%가 이에 해당한다는 점도 함께 밝혀졌습니다.
HER2는 단순한 유전자가 아니라, 암의 공격성을 규정하는 핵심 표지자였던 셈입니다.
“이 단백질을 직접 막을 수 있을까?”
HER2가 암의 악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치료 전략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HER2는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에도 존재하는 단백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억제할 경우 정상 조직까지 손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습니다.
당시 항체 치료는 실험적 개념에 가까웠고, 고형암 치료에 성공한 전례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연구자와 제약사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넨텍의 면역학자 H. 마이클 셰퍼드(H. Michael Shepard)는 항체가 HER2 신호 전달을 차단할 수 있다는 가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HER2에 결합하는 단일클론 항체 4D5를 개발했고, 이후 인간 면역계와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항체를 인간화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연구가 훗날 허셉틴으로 이어집니다.
허셉틴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
이렇게 완성된 인간화 항체의 성분명은 트라스투주맙(trastuzumab)이며, 상품명은 허셉틴(Herceptin)으로 명명되었습니다.
HER2와 ‘지각(perception)’을 결합한 이 이름에는, 암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꾼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의 성공이 곧바로 임상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소규모 임상과 환자들의 절박한 선택
1992년, 제넨텍과 UCLA는 말기 HER2 양성 유방암 환자 15명을 대상으로 임상 1상 시험을 시작합니다.
이 시험에서 일부 환자의 종양이 실제로 줄어드는 반응이 관찰되었고, 이는 항체 치료가 암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신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상 확대는 쉽지 않았습니다. 비용 부담, 환자 선별의 어려움, 그리고 여전한 회의론이 연구를 가로막았습니다.
이때 상황을 움직인 것은 환자들이었습니다.
임상시험에 참여했던 환자들과 가족들은 약의 가능성을 체감했고, 제넨텍과 의료진에게 치료 기회를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와 편지, 직접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제넨텍은 제한된 수량의 약물을 추첨 방식으로 제공하면서 임상 3상 시험을 진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임상 3상, 그리고 역사적인 승인
1996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임상 3상 시험에는 900명 이상의 HER2 양성 유방암 환자가 참여했습니다.
허셉틴과 표준 화학요법을 병행한 환자군은 화학요법 단독군에 비해 사망 위험이 유의하게 감소했고, 무병 생존 기간도 뚜렷하게 연장되었습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FDA는 1998년 9월 25일 허셉틴을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 치료제로 승인합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표적 항체 기반 항암제 승인으로, 암 치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허셉틴 이후의 변화
허셉틴은 하나의 약물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암을 유전자와 단백질 수준에서 이해하고, 특정 표적을 정밀하게 공격한다는 개념을 실제 치료로 증명했습니다.
이후 허셉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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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수술 후 보조요법 적응증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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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HER2 양성 위암 및 위식도접합부암으로 확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환자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허셉틴을 기반으로 한 항체-약물 접합체 카드실라(Kadcyla)는 차세대 정밀 항암치료의 대표 주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허셉틴을 만든 과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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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울리히: HER2 유전자 발견 및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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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마이클 셰퍼드: 트라스투주맙 항체 설계와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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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J. 슬라몬: HER2 예후 인자 규명 및 임상시험 주도
이 세 명의 과학자는 2019년 라스커–드베이키 임상의학 연구상을 공동 수상하며, 허셉틴의 의학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맺음말: 가능성을 치료로 만든 이야기
허셉틴의 역사는 단순한 신약 개발 성공담이 아닙니다.
이는 과학적 집념, 임상의 용기, 그리고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던 환자들의 선택이 함께 만든 결과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표적 항암제와 정밀의학 치료법은 모두 허셉틴이 남긴 길 위에 서 있습니다.
허셉틴은 지금도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며, 과학이 생명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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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mon DJ et al. Human breast cancer: correlation of relapse and survival with amplification of the HER-2/neu oncogene. Science,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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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dis CA. Trastuzumab—mechanism of action and use in clinical practic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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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ker Foundation. 2019 Lasker~DeBakey Clinical Medical Research A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