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원이 림프구를 깨우는 순간: 히르슈혼의 항원 특이적 림프구 실험
발행: 2025-12-27 · 최종 업데이트: 2025-12-27
PHA 이후, 항원이 인간 말초혈액 림프구를 선택적으로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한 히르슈혼의 연구를 정리합니다.

피터 노웰이 피토헤마글루티닌(phytohemagglutinin, PHA)을 이용해 림프구를 시험관 안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면역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옮겨갔습니다.
“PHA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림프구를 증식시킬 수 있을까?”
1960년 노웰의 논문이 발표되자,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여러 연구 그룹이 이 현상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연구팀이 바로 뉴욕대학교(NYU)의 커트 히르슈혼연구 그룹이었습니다.
히르슈혼은 세포유전학자(cytogeneticist)였기 때문에 노웰의 결과에 즉각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포유전학자에게는 정상 세포의 염색체를 관찰하기 위해 세포를 유사분열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PHA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르슈혼의 관심은 단순히 “세포를 증식시키는 기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PHA가 세포 분열을 유도한다면, 특정 항원(specific antigen)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세포 생리 반응이 아니라, 면역학적 반응인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 면역학의 핵심을 정확히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즉 PHA 가 면역세포 분열을 일으킨 것이 면역세포의 면역반응을 유도했기 때문인가라는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항원에 반응하는 세포는 정말 증식하는가
히르슈혼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만약 PHA가 면역반응을 유도해서 세포가 분열했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림프구가 면역기억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미 어떤 항원에 노출되어 면역 기억(immunologic memory)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림프구를 시험관에서 배양하고 해당 항원을 넣었을 때, 정말로 그 항원에 특이적인 세포만 선택적으로 분열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프랭크 맥팔란 버넷이 제시한 클론 선택설(clonal selection theory)이 실제 생물학적 현상으로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항원이 특정 클론을 선택한다면, 그 클론은 반드시 증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히르슈혼의 실험은 단순한 자극 실험이 아니라, 면역 기억을 세포 수준에서 직접 확인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당시에는 T세포와 B세포의 구분도 없었고, 항체를 만드는 세포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항원을 기억하는 림프구’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실험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던 시기였습니다.
시험관 안에서 재현된 면역 반응
히르슈혼의 실험은 인간 말초혈액에서 림프구를 분리해 배양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PBMC 분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백혈구층을 얻고, 혈청이 포함된 배지에서 3~7일간 배양했습니다.
그 뒤 PHA를 넣은 조건, 특정 항원을 넣은 조건,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림프구를 섞는 조건을 차례로 비교했습니다.
먼저 PHA를 넣었을 때, 림프구는 강력하게 활성화되었습니다. 작은 림프구는 빠르게 커다란 blast 세포로 변했으며, 유사분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더 나아가 γ-글로불린(γ-globulin) 생산도 증가했습니다.
히르슈혼은 이 반응이 단순한 세포 팽창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전사 억제제인 액티노마이신 D(actinomycin D)를 사용했습니다. 약물을 처리하자 γ-글로불린 생성이 즉각 억제되었고, 이는 이 반응이 새로운 RNA와 단백질 합성을 필요로 하는 능동적인 면역 반응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이 실험은 노웰의 발견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제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항원을 넣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항원 특이적 림프구 반응의 첫 직접 증거
히르슈혼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항원 특이성을 직접 보여준 데 있습니다. 그는 결핵균 항원인 튜버큘린(tuberculin, PPD), 디프테리아·백일해 백신 항원, 그리고 페니실린 알레르기 환자의 경우 페니실린 관련 항원을 사용했습니다.
결과는 매우 명확했습니다.
과거에 해당 항원에 노출된 적이 있는 사람의 림프구만이 blast로 변환되고, 유사분열과 γ-글로불린 생성이 증가했습니다.
반대로, 그 항원에 노출된 적이 없는 사람의 림프구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 반응은 PHA와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PHA는 거의 모든 림프구를 동시에 자극하는 비특이적 미토겐이지만, 항원은 전체 림프구 중 극히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했습니다.
즉, 말초혈액 속 작은 림프구들 가운데 일부는 특정 항원을 기억하고 있으며, 다시 그 항원을 만났을 때 오직 그 세포들만 깨어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직접 관찰된 것입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이는 항원 특이적 클론의 선택적 활성화(clonal activation)에 대한 최초의 인간 세포 실험 자료였습니다. 당시에는 T세포나 B세포, 항원 수용체(TCR/BCR)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히르슈혼은 이를 “sensitized lymphocytes”라고 불렀지만, 그가 본 현상은 오늘날의 클론 선택 모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히르슈혼 연구의 역사적 의미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어진 히르슈혼의 연구는 면역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말초혈액 림프구가 면역 반응의 말단이 아니라, 면역 기억을 보관하고 다시 반응하는 핵심 세포임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항원 특이적 림프구 활성화를 인간 세포에서 직접 관찰함으로써, 클론 선택 이론을 실험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T세포 활성화를 측정하는 실험의 원형이 되는 blast transformation assay를 정립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노웰이 “림프구는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히르슈혼은 “그 림프구는 항원을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이 연결고리를 통해 이후 T세포와 B세포의 분리, 항원 수용체의 발견, HLA 기능 규명으로 이어지는 현대 세포 면역학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됩니다.
결론
피터 노웰이 PHA 실험으로 림프구가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커트 히르슈혼은 그 깨어남이 면역 반응의 일부임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말초혈액 림프구가 단순한 순환 세포가 아니라, 특정 항원을 기억하고 다시 반응하는 면역 반응의 출발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관련논문
- Kurt Hirschhorn (1963) Mitogenic action of phytohaemagglutinin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