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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혈청학의 탄생: 폰 베링과 키타사토의 1890년 논문

발행: 2026-01-08 · 최종 업데이트: 2026-01-08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연구를 통해 항체와 혈청치료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1890년 고전 논문을 살펴봅니다.

Über das Zustandekommen der Diphtherie-Immunität und der Tetanus-Immunität bei Thieren
Emil von Behring, Shibasaburo Kitasato · Deutsche Medizinische Wochenschrift · 1890
세포가 없는 혈액 성분(혈청)이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을 예방·치료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항체와 체액성 면역(humoral immunity)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역사적 논문.

베를린에서 태어난 새로운 면역 개념

1890년, 에밀 폰 베링시바사부로 키타사토는 독일의 의학 주간지에 짧지만 대담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논문의 제목은 “디프테리아 면역과 파상풍 면역이 동물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였고, 그 첫 문장은 사실상 선언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은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을 치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방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연구는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 의학계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루이스 파스퇴르학파와, 베를린의 로베르트 코흐학파 사이의 치열한 경쟁 속에 있었습니다. 폰 베링과 키타사토는 바로 코흐의 연구실에서 일하던 젊은 연구자들이었습니다.

독이 문제였다: 균이 아니라 독소(toxin)

이 논문의 사상적 배경에는 파리에서 이루어진 선행 연구가 있었습니다. 1888년, 에밀 루(Émile Roux)는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의 병리 현상이 세균 자체가 아니라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이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폰 베링과 키타사토는 “그렇다면 면역의 표적은 균이 아니라 독소여야 한다”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에는 단백질(protein)이라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그들은 실험을 통해 이 가설을 밀어붙였습니다.

토끼와 생쥐로 증명한 ‘혈액의 힘’

두 사람은 파상풍 실험을 중심으로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실험 설계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토끼를 파상풍 독소로 면역시킨 뒤, 이 토끼의 혈액에서 세포를 제거한 혈장또는 혈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혈액 성분을 생쥐에게 주사한 뒤, 치사량의 파상풍 독소를 투여했습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대조군 생쥐는 모두 사망했지만, 면역된 토끼의 혈청을 받은 생쥐는 멀쩡히 살아남았습니다. 독소와 혈청을 시험관에서 미리 섞은 뒤 주사해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보호 효과는 혈액 속 어떤 ‘수용성 물질’에 의해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이 논문은 오늘날 우리가 항체라고 부르는 존재를 처음으로 기능적으로 묘사한 연구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까지 “항체”라는 용어조차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기존 면역 이론에 대한 도전

폰 베링과 키타사토는 기존 면역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당시 한 축은 엘리 메치니코프가 제시한 식세포 작용(phagocytosis) 중심의 설명이었고, 다른 한 축은 파스퇴르가 주장한 “약독화된 생균이 숙주의 영양을 고갈시켜 면역이 생긴다”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은 이 설명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두 질병은 독소만으로도 치명적이었고, 생균이 없어도 면역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은 면역을 체액성(humoral) 현상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이후의 갈림길: 영광과 그림자

1891년, 키타사토는 일본으로 귀국해 감염병 연구소를 설립하며 일본 미생물학의 토대를 닦습니다. 반면 폰 베링은 말(horse)을 이용한 대량 혈청 생산으로 혈청치료(serotherapy)를 실용화했고, 그 공로로 1901년 최초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합니다. 이 상은 디프테리아 연구에 대해서만 수여되었고, 키타사토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선택은 오늘날까지도 과학사에서 논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1890년 이 짧은 논문이 없었다면 이후의 혈청학, 항체 개념, 그리고 현대 면역학의 절반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혈액은 ‘특별한 액체’였다

논문 말미에서 두 사람은 고대 문헌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혈액은 특별한 액체이다.”

이 문장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이후 한 세기를 관통하는 면역학의 출발 선언에 가까웠습니다. 세포가 아니라, 혈액 속 보이지 않는 분자가 질병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과학의 언어로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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