펩타이드는 정말 MHC에 붙는가: 항원 제시의 분자적 실체를 처음으로 보여준 1985년
발행: 2026-01-02 · 최종 업데이트: 2026-01-02
1985년 Nature에 발표된 Emil Unanue의 논문은, 정제된 MHC class II(I-A) 분자가 면역원성 펩타이드를 특이적이고 포화 가능하게 결합함을 분자 수준에서 처음으로 증명하며 현대 항원 제시 개념의 토대를 확립했다.
“항원은 정말 MHC에 붙어 있는가?”라는 오래된 의문
오늘날 면역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T 세포는 펩타이드–MHC 복합체를 인식한다”는 문장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문장은 절반은 확신, 절반은 추측에 가까운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면역학자들은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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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세포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항원제시세포(APC)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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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헬퍼 T 세포(CD4⁺ T 세포)는 MHC class II 분자를 발현하는 전문적 항원제시세포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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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세포는 “가공된(processed)” 항원을 인식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결정적인 공백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공된 펩타이드는 정말로 MHC 분자에 ‘직접 결합’해 있는가?
많은 연구자들이 직관적으로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를 분자 수준에서 직접 증명한 실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Emil Unanue의 오랜 질문
이 논문의 중심에는 Emil R. Unanue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대식세포(macrophage)가 항원을 섭취한 뒤 그 항원을 오랜 시간 동안 면역원성 상태로 유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훗날 “항원 처리(antigen processing)와 항원 제시(antigen presentation)”라 불리게 될 분야를 연 연구자였습니다.
Unanue의 문제의식은 일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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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원은 단순히 세포 표면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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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내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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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세포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까지도, MHC 분자 그 자체가 펩타이드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습니다.
“세포 전체”가 문제였다
이 문제를 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실험 재료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살아 있는 APC 전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항상 따라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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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타이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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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C에 결합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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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세포막의 다른 단백질이나 지질에 비특이적으로 붙은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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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signal)보다 잡음(noise)이 훨씬 크다
즉, “펩타이드가 MHC에 붙는다”는 가설을 직접적으로 검증할 실험 조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 MHC만 꺼내놓자
Unanue와 동료들이 내린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과감했습니다.
“세포를 쓰지 말고, MHC 분자만 정제해서 그 분자에 펩타이드가 붙는지를 보자.”
이 접근은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기술적·물량적으로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1,000억 개의 B 세포가 필요했던 이유
연구진은 특정 MHC class II(I-A) 대립유전자를 안정적으로 발현하는 B 세포 하이브리도마를 제작합니다. 하이브리도마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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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일한 유전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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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증식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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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배양 가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제 가능한 양의 MHC 분자를 얻기 위해 필요한 세포 수는 무려 10¹¹개(1,000억 개)에 달했습니다.
이 숫자는, 이 실험이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물량으로 밀어붙인 생화학 실험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정제된 MHC, 그리고 깔끔한 두 개의 밴드
세포를 질소 캐비테이션으로 파괴한 뒤, 세포막 분획을 회수하고 MHC를 인식하는 단일클론 항체를 이용한 친화 크로마토그래피로 MHC 분자만을 선택적으로 정제합니다.
그 결과물은 SDS-PAG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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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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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 사슬
딱 두 개의 밴드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연구진이 정말로 “순수한 MHC class II 분자”를 손에 넣었음을 의미했습니다.
펩타이드는 여전히 면역원성을 유지하는가
이제 남은 문제는 펩타이드였습니다. 연구진은 고전적인 모델 항원인 hen egg lysozyme(HEL)에서 유래한 면역원성 펩타이드를 선택합니다.
이 펩타이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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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I-A 대립유전자를 가진 마우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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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4⁺ T 세포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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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인식하는 T 세포 하이브리도마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연구진은 이 펩타이드에 형광 표지(NBD)를 붙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형광 표지가 붙은 상태에서도 펩타이드의 면역원성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약간 더 강한 T 세포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형광으로 결합을 추적해도 생물학적 의미가 유지된다”는 중요한 전제가 확보됩니다.
평형 투석으로 본 ‘진짜 결합’
정제된 MHC 분자와 형광 표지 펩타이드를 이용해 연구진은 평형 투석(equilibrium dialysis)이라는 고전적이지만 매우 강력한 결합 분석 기법을 사용합니다.
그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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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타이드 농도가 증가함에 따라 결합량이 증가하다가 포화(saturation)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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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tchard 분석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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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결합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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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 ≈ 2 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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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결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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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특이적 흡착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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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결합 자리를 가진 수용체–리간드 결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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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로 표현 가능한 친화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합한다”는 말에 필요한 최소 조건
이 논문이 특별한 이유는, “펩타이드가 MHC에 결합한다”는 주장을 아주 보수적인 기준으로 검증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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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성(satur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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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성(speci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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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 가능한 친화도(Kd)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만
연구진은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짜 결합을 보고 있다.”
이후의 퍼즐 조각들
이 논문이 나온 지 불과 2년 뒤, MHC 분자의 입체 구조가 X선 결정학으로 밝혀지면서 이 결합의 물리적 모습이 눈앞에 드러납니다.
핫도그 번처럼 벌어진 홈(groove)에 펩타이드가 길게 누워 있는 구조는, Unanue 논문에서 제시된 정량적 결합 데이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정리하며
1985년 이 짧은 Nature 논문은, 다음 질문에 처음으로 명확한 답을 주었습니다.
“펩타이드는 정말 MHC에 붙는가?”
그 대답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측정할 수 있다”였습니다.
이 논문 이후, 항원 제시는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분리·정제·정량 가능한 분자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현대 면역학의 기본 단위인 펩타이드–MHC 복합체는 바로 이 순간, 실체를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