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이란 말은 은유이다
발행: 2025-12-18 · 최종 업데이트: 2025-12-18
면역(immunity)과 면역력은 명확한 실체라기보다 은유에서 출발한 개념이며, 이 언어적 출발점은 면역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규정해 왔다.
면역은 처음부터 실체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면역을 하나의 분명한 생물학적 능력처럼 말합니다.
“면역이 있다”, “면역이 무너졌다”,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는 표현은
마치 면역이 측정 가능한 단일한 대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면역학의 출발을 되짚어 보면,
면역은 처음부터 명확한 실체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면역은 은유에서 시작된 드문 학문적 개념에 가깝습니다.
해부학은 장기와 조직이라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가졌고,
미생물학은 세균과 바이러스라는 관찰 가능한 존재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면 면역학은 “왜 어떤 사람은 다시 병에 걸리지 않는가”라는
현상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했을 뿐,
그 현상을 설명할 구체적인 실체는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언어에서 빌려온 ‘면역’
면역(immunity)이라는 말은 라틴어 immunis에서 유래했으며,
본래는 세금이나 병역 같은 사회적 의무에서 면제된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즉, 이 단어는 처음부터 의학 용어가 아니라 법적·사회적 지위를 설명하는 언어였습니다.
이 개념이 의학으로 옮겨온 것은 전염병을 앓고 난 뒤 다시 같은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사회적 개념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신체 상태에 비유적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면역이라는 말이 어떤 생물학적 구조를 발견한 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 알 수 없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선택된 언어였다는 점입니다.
실체보다 앞선 은유
면역학의 초기에는 항체(antibody), 림프구(lymphocyte), 사이토카인(cytokine) 같은
구체적인 분자적 실체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방어”, “기억”,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의 구분”이라는 서사적 개념들이 먼저 등장했습니다.
엘리 메치니코프(Élie Metchnikoff)의 식세포(phagocyte) 이론이나,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의 “마법의 탄환”이라는 표현은 과학적 가설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은유였습니다. 이 은유들은 면역 반응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했고, 그 틀 안에서 실험과 관찰이 진행되었습니다. 즉, 면역학은 실체를 발견한 뒤 개념을 만든 학문이 아니라, 개념을 먼저 세우고 실체를 찾아 나간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면역력이라는 또 하나의 은유
이 흐름 위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면역력입니다. 면역력이라는 말은 과학 논문에서 엄밀하게 정의된 단일 지표라기보다, 다양한 면역 반응의 상태를 하나의 말로 묶기 위한 표현에 가깝습니다.
실제 면역학에서 다루는 것은 항체의 농도, 특정 T세포의 활성, 염증 반응의 조절, 기억 반응의 지속성 등 서로 다른 방향성과 의미를 가진 수많은 지표들입니다. 이 복잡한 상태를 일상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면역이 잘 작동한다”는 의미를 담은 면역력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이 점에서 면역력이 합의된 정의를 갖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면역은 본질적으로 맥락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왜 면역력은 하나로 정의될 수 없을까요?
면역 반응은 단순히 강할수록 좋은 구조가 아닙니다.
-
감염에 대한 반응이 강하면 자가면역질환의 위험이 커질 수 있습니다.
-
염증 반응이 억제되면 조직 손상은 줄어들지만 초기 방어는 약해질 수 있습니다.
-
알레르기 반응은 과도한 면역 반응의 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면역은 “높다/낮다”라는 하나의 축으로 평가할 수 없는 다층적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면역력을 근력이나 체력처럼 의도적으로 계속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과도한 단순화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면역력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역력이라는 은유는 여전히 널리 사용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 복잡한 면역 현상을 설명하기에 언어적으로 매우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면역력을 관리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건강에 대한 통제 가능성의 감각을 제공합니다.
문제는 이 은유를 설명 도구가 아니라 실제 생물학적 실체처럼 받아들일 때 발생합니다.
“면역력은 무조건 높여야 한다”는 사고는 면역학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은유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은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은유라는 사실을 인식한 채 사용하는 것입니다.
면역은 은유에서 출발한 개념이고, 면역력은 그 은유가 일상 언어로 확장된 표현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면역학은 더 이상 모호한 학문이 아니라 언어와 과학이 함께 진화해 온 독특한 지적 전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면역이란 말은 은유이다”라는 문장은 면역학을 약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이 학문의 성격과 한계를 정확히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Tauber, A. I. Immunity: The Evolution of an Idea. Oxford University Press. https://academic.oup.com/book/4153
-
Metchnikoff, E. Immunity in Infective Diseas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https://scispace.com/pdf/immunity-in-infective-diseases-by-elie-metchnikoff-279tpwqala.pdf
-
Philosophy of Immunolog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chive.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25/entries/immunology/
-
Hidetaka Yakura, (2024) Immunity From Science to Philosophy.CRC. https://www.taylorfrancis.com/books/mono/10.1201/9781003486800/immunity-hidetaka-yaku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