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 - 윌리엄 콜리와 면역치료의 기원
발행: 2026-01-08 · 최종 업데이트: 2026-01-08
콜리의 독소로 알려진 암 면역치료의 출발점, 1893년 윌리엄 콜리의 고전 논문을 통해 초기 면역치료의 탄생과 한계를 살펴봅니다.
젊은 외과의사, 윌리엄 콜리의 문제의식
1893년, 윌리엄 콜리(William B. Coley)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다소 위험하고 과감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훗날 “콜리의 독소(Coley’s toxins)”로 불리게 되는 치료의 출발점이 된 이 논문은,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감염과 암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룬 임상 보고였습니다.
콜리는 예일대학교를 거쳐 하버드 의과대학을 26세의 나이에 졸업한 뒤, 뉴욕으로 와서 New York Hospital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1890년, 불과 28세의 나이에 개원한 그는 젊은 외과의사로서 빠르게 임상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과 연구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건은 개원 초기 진료한 한 명의 젊은 여성 환자였습니다. 손등의 작은 결절로 시작된 병변은 결국 골육종(osteosarcoma)으로 진단되었고,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절단 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 불과 한 달 만에 전신 전이가 확인되었고, 환자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이 경험은 콜리에게 깊은 좌절을 안겼습니다. 그는 이후 병원 기록을 직접 뒤져 골육종 환자 약 90례를 검토했고, 수술만으로 5년 이상 생존한 비율이 약 3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다시 말해, 겉보기에는 수술이 가능해 보여도 실제로는 이미 전신 질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감염과 종양 소실에 대한 오래된 관찰
콜리가 주목한 것은 문헌 속에 산발적으로 등장하던 하나의 공통된 관찰이었습니다. 심각한 감염, 특히 단독과 같은 고열성 감염을 앓고 살아남은 일부 환자에서 종양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현상이 보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배경에는 19세기 후반, 즉 세균학(bacteriology)의 황금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파스퇴르와 로버트 코흐의 업적으로 수많은 병원체가 규명되던 시기였고, 1883년에는 프리드리히 펠라이젠이 연쇄상구균 Streptococcus pyogenes를 분리·배양하는 데 성공합니다. 펠라이젠은 이 균이 단독과 봉와직염(cellulitis)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혔을 뿐 아니라, 골육종과 육종 환자에게 실험적으로 감염을 유도하는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7명의 환자 중 2명에서 완치를, 1명에서 종양 크기 감소를 보고했습니다. 콜리는 이미 1891년 논문에서 이 사실을 인용하며 알고 있었고,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습니.
펠라이젠의 선행시험
19세기 후반, 감염과 암의 관계라는 매우 이른 질문을 실제 환자에게 적용해 본 독일의 세균학자입니다. 오늘날 이름은 거의 잊혔지만, 콜리 이전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펠라이젠은 1883년, 당시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의 흐름 속에서 연쇄상구균 Streptococcus pyogenes를 처음으로 분리·배양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균이 우리가 단독(erysipelas)이라 부르던 피부 감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이 발견만으로도 그는 세균학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펠라이젠이 진짜 흥미로운 인물이 되는 지점은 그 다음입니다. 그는 단독을 앓은 뒤 살아남은 일부 암 환자에서 종양이 줄어들거나 사라졌다는 오래된 임상 관찰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감염을 의도적으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1880년대 초, 그는 골육종을 포함한 육종 환자 5~7명에게 살아 있는 연쇄상구균을 감염시키는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일부 환자에서 종양의 현저한 축소, 심지어 완전 소실에 가까운 반응이 관찰되었다고 보고합니다. 그는 총 7명 중 2명에서 완치를, 1명에서 의미 있는 종양 감소를 보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이 치료는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고열과 전신 감염은 언제든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었고,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윤리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펠라이젠은 “감염이 암의 경과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보여준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윌리엄 콜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콜리는 1891년 자신의 논문에서 이미 펠라이젠의 연구를 인용했고, 1893년 논문 역시 이 흐름 위에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콜리는 완전히 무(無)에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펠라이젠이 열어둔 문을 더 집요하게 밀어붙인 임상의였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면역치료의 할아버지”로 기억되는 인물은 펠라이젠이 아니라 콜리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펠라이젠은 몇 건의 보고를 남기고 물러났지만, 콜리는 수십 년에 걸쳐 치료를 지속했고, 체계적인 증례 보고와 후속 개념(독소, 면역 반응)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페일라이젠은 최초의 실험자였고, 콜리는 최초의 집요한 추적자였습니다. 암 면역치료의 역사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19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893년 논문: 살아 있는 균을 종양에 주사하다
콜리의 1893년 논문은 총 25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0명의 수술 불가능 암 환자에 대한 증례 보고(case report)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환자들은 모두 종양 내부에 살아 있는 연쇄상구균을 직접 주사받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첫 번째 증례는 머리와 목 부위에 거대한 육종을 가진 35세 남성이었습니다. 주사 후 환자는 체온이 105°F(약 40.5°C)까지 상승했고, 종양 부위에는 심한 단독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반복 주사 후 종양은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논문 작성 시점까지 이 환자는 2년 이상 재발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증례들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일부에서는 일시적 종양 감소가 있었지만 재발했고, 어떤 환자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10명 중 완전 관해(complete remission)에 도달한 환자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결과가 갖는 의미는 작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치료하지 않으면 생존율이 0%에 가까운 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콜리는 중요한 패턴 하나를 발견합니다. 강한 전신 감염 반응, 즉 고열과 명확한 단독 증상이 나타난 경우에만 종양 반응이 관찰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균에서 독소로
논문 말미의 “인쇄 중 추가(note in press)”는 이후 역사를 바꿉니다. 콜리는 네덜란드 라이덴(Leiden)의 한 연구자가 살아 있는 균이 아니라, 균이 만들어낸 독소(toxin)만으로도 유사한 효과를 보고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이 연구자는 Spronk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균 배양액을 가열·여과한 상청액을 사용해 26명의 환자를 치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콜리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살아 있는 균의 위험성을 인식한 그는 이후 연쇄상구균과 더불어 장내세균(coliform bacteria)을 함께 배양한 뒤 사멸시켜 독소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 이 과정에서 포함된 지질다당류(lipopolysaccharide, LPS)는 강력한 면역 보강제(adjuvant)입니다.
당시 콜리의 나이는 겨우 30세 안팎이었습니다.
표준화되지 못한 치료와 주변부로 밀려난 면역치료
1895년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약 50년 동안, 20명 이상의 의사들이 콜리의 독소를 사용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일부는 긍정적인 결과를 재현했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표준화된 프로토콜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균 준비 방식, 용량, 주사 간격이 모두 달랐습니다.
동시에 의학계에는 방사선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빌헬름 렌트겐, 앙리 베크렐, 그리고 마리 큐리로 이어지는 발견은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빠르게 바꾸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는 거의 모든 환자에서 종양 감소를 보였고, 콜리의 독소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이후 항암 화학요법이 발전하면서 암 치료의 중심은 수술, 방사선, 화학요법의 세 축으로 굳어졌고, 면역치료는 오랫동안 잊힌 개념이 됩니다.
딸이 이어간 유산: 헬렌 콜리 노츠
이 흐름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콜리의 작업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딸 Helen Coley Nauts입니다. 그녀는 1946년, 전 세계 문헌을 뒤져 콜리의 독소로 치료된 환자 300여 명을 정리한 대규모 리뷰를 발표합니다. 그중 약 143명이 5년 이상 생존했다는 보고는, 당시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성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면역치료는 다시 주류로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은, 훨씬 뒤 Georges Mathé가 BCG(Bacillus Calmette–Guérin)를 이용한 치료를 시도하면서부터입니다.
1893년의 콜리 논문은 성공과 실패가 뒤섞인 기록이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를 남깁니다. 면역계는 암과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때로는 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직관을 최초로 임상 현장에서 집요하게 추적한 시도였다는 점입니다.
Cancer Research Institute와의 관계
1953년 Cancer Research Institute가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과학자의 집념과 한 자본가의 결단이 만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콜리의 딸이었던 Helen Coley Nauts는, 아버지가 남긴 면역치료 연구가 “재현성 없는 위험한 시도”라는 이유로 의학계에서 잊혀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수십 년에 걸쳐 전 세계 문헌을 직접 뒤지며, 콜리의 독소로 치료받은 수술 불가능 암 환자들의 장기 생존 사례를 하나하나 정리했습니다. 헬렌에게 이 작업은 연구가 아니라, 사라질 뻔한 가능성을 지켜내는 일이었습니다.
이 집요한 기록과 설득이 닿은 인물이 바로 미국의 기업가이자 자선가였던 Oliver R. Grace였습니다. 그는 W. R. Grace & Co.를 통해 축적된 막대한 산업 자본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누구도 선뜻 투자하려 하지 않던 암 면역치료 연구에 자금을 투입하기로 결단합니다. 정부도, 주류 의학계도 외면하던 분야였지만, 그는 “지금은 비주류일지라도 언젠가는 의학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 돈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Cancer Research Institute는 국가 예산이 아닌 민간 신념 자본으로 출발한, 세계 최초의 암 면역치료 전문 연구 기관이었습니다. 이 작은 선택은 훗날 면역관문억제제와 T세포 치료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의 씨앗이 되었고, 한때 잊혔던 콜리의 직관이 다시 과학의 무대 위로 돌아오는 계기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암 면역치료의 역사가 단순한 기술 발전의 연대기가 아니라, 사람의 믿음과 결단이 과학을 살려낸 서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관련문헌
-
Coley, William B. “The Treatment of Malignant Tumors by Repeated Inoculations of Erysipelas.” American Journal of the Medical Sciences, 1893.
https://doi.org/10.1097/00000441-189301000-00001 -
Fehleisen, Friedrich. “Ueber die Züchtung der Erysipelkokken.” Deutsche Medizinische Wochenschrift, 1883.
https://babel.hathitrust.org -
Nauts, Helen Coley, et al. “The Treatment of Malignant Tumors by Bacterial Toxins.” Cancer Research, 1946.
https://aacrjournals.org/cancerres -
McCarthy, E. F. “The Toxins of William B. Coley and the Treatment of Bone and Soft-Tissue Sarcomas.” Iowa Orthopedic Journal, 2006.
https://pubmed.ncbi.nlm.nih.g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