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천 년 먹어온 식품'이 유럽에서는 금지되는가: 벨기에 사건, THMPD, 그리고 Novel Food
발행: 2026-01-31 · 최종 업데이트: 2026-04-21
1990년대 벨기에 한약 신장병 사건을 계기로 전통 사용 이력과 현대 안전성 평가가 어떻게 충돌하는지, THMPD와 Novel Food 규정의 관점에서 정리합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먹어온 것인데 왜 유럽에서는 허가를 받아야 하느냐”는 말은 식품 수출이나 전통 원료 논의에서 자주 나옵니다. 국내에서는 그 말이 꽤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오랫동안 먹어왔고, 큰 문제가 없었다면 안전한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유럽 규제 당국의 관점은 다릅니다. 유럽은 “어느 문화권에서 오래 사용되었는가”보다 “EU 소비자가 같은 조건에서 안전하게 섭취해 왔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행정 장벽이 아니라, 실제 피해 사건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규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 사건이 1990년대 벨기에에서 발생한 한약 신장병 사건입니다.
벨기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990년대 초 벨기에의 한 다이어트 클리닉에서는 체중 감량 목적으로 중국 약재를 포함한 처방이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이 처방을 받은 여성들 가운데 다수가 빠르게 진행하는 신장 손상을 겪었습니다. 일부는 말기 신부전으로 진행해 투석이나 신장이식이 필요했고, 이후 요로상피암 위험 증가도 보고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Chinese herb nephropathy”라고 불렸지만, 원인이 더 분명해진 뒤에는 aristolochic acid nephropathy, 즉 아리스톨로킥산 신증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특정 전통 전체가 아니라 식물의 정확한 동정과 독성 성분 관리였습니다. 원래 처방에서 의도된 약재는 방기 계열이었지만, 실제로는 **광방기(Aristolochia fangchi)**가 들어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광방기는 Aristolochia 속 식물이고, 이 속의 일부 식물은 **아리스톨로킥산(aristolochic acid)**을 함유합니다. 아리스톨로킥산은 신장 독성과 발암성이 강한 물질로, 짧은 노출보다 반복적이고 누적적인 노출에서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이 사건이 무서웠던 이유는 “전통 약재가 위험하다”는 단순한 결론 때문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점은, 전통 명칭만으로는 실제 식물 종과 화학 성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대규모 인체 피해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름 아래 지역과 유통 과정에 따라 다른 식물이 들어갈 수 있고, 그 차이가 안전성과 독성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왜 하필 벨기에에서 크게 드러났나
비슷한 약재 혼동은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기에 사건은 몇 가지 조건이 겹치면서 집단적 피해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첫째, 같은 클리닉에서 비슷한 처방이 여러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사용이 아니라, 비교적 표준화된 방식으로 다수에게 투여된 것입니다. 둘째, 아리스톨로킥산의 독성은 급성 중독처럼 바로 드러나기보다 신장을 서서히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셋째, 의료진이 유사한 임상 양상을 비교적 빨리 포착했고, 이를 우연한 개별 사례가 아니라 공통 원인이 있는 집단적 사건으로 인식했습니다.
이 조건들이 맞물리면서, 전통 약재 유통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식물 혼동 문제가 유럽 의료 시스템 안에서 명확한 안전성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유럽 규제 당국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하나의 교훈을 남겼습니다. 오래 사용되었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히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떤 성분이 있는지, 어느 정도 노출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전통 사용 이력은 왜 충분한 증거가 아닌가
전통 사용 이력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식품이나 약재가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안전성 평가에서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규제에서 자동 허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전통 사용은 대개 지역적이고, 사용 방식이 제한적이며, 기록이 불완전합니다. 반면 현대 상품은 추출 농도가 높고, 섭취 대상이 넓고, 유통 범위가 크며, 마케팅에 따라 장기 반복 섭취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이 간헐적으로 먹던 것이, 현대에는 캡슐이나 농축 추출물 형태로 매일 복용되는 제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오래 먹어왔다”는 말은 안전성을 어느 정도 암시할 수는 있어도, 현대적 노출 조건을 그대로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벨기에 사건은 이 차이를 강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문제는 전통 그 자체가 아니라, 전통 지식이 현대의 대량 유통과 표준화된 안전성 검증 체계로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THMPD는 무엇을 묻는가
이런 배경에서 유럽은 전통 허브 의약품에 대해 별도의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2004년 제정된 **Traditional Herbal Medicinal Products Directive(THMPD)**는 전통 허브 의약품을 일반 신약처럼 모두 다루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롭게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THMPD의 핵심은 “전통적으로 쓰였다”는 주장을 문서로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최소 30년의 의약적 사용 이력이 필요하고, 그중 15년은 EU 내 사용 이력이 요구됩니다.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독성 자료, 품질 관리 자료, 제조 표준화 자료가 더 중요해집니다.
이 기준은 전통 의학을 부정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전통 제품을 현대 의약품 시장 안으로 들여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통 한약 산업 입장에서는 이 요구가 매우 높은 장벽이 됩니다. 약재의 식물학적 동정, 성분 표준화, 오염 관리, 장기 안전성 자료를 일관되게 제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Novel Food는 왜 식품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가
식품 영역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작동합니다. EU의 Novel Food 제도는 1997년 5월 15일 이전에 EU 내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소비된 이력이 없는 식품이나 식품 성분을 신규 식품으로 봅니다. 이 경우 제조사나 수입자는 안전성을 입증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Novel Food가 벨기에 사건 하나에서 직접 만들어진 제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Novel Food 규정은 더 넓은 식품 안전 관리 체계 안에서 발전했습니다. 다만 벨기에 사건과 Novel Food는 같은 질문을 공유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래 먹었다는 말이, EU 소비자에게 같은 조건에서 안전하다는 증거가 되는가?
유럽의 답은 대체로 “그 자체로는 부족하다”입니다. 특히 원료가 추출물, 농축물, 발효물, 기능성 성분처럼 기존 식품과 다른 형태로 제공될 때는 더 그렇습니다. 김치나 된장처럼 음식 전체로 알려진 전통 식품과, 특정 미생물·대사산물·추출 성분을 농축한 원료는 규제상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식품 수출에서 왜 문제가 되는가
한국 식품이나 건강기능성 원료가 유럽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익숙한 원료라도 EU 시장에서는 충분한 섭취 이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한약재 기반 추출물, 특정 허브 성분, 농축 발효 원료는 Novel Food 검토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국내에서는 “한국인은 오래 먹어왔다”는 설명이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 규제에서는 “EU에서 누가, 얼마나, 어떤 형태로 먹어왔는가”가 중요합니다. 더구나 전통 음식으로 먹은 이력과 농축 추출물로 섭취하는 이력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규제 당국은 음식 문화의 정당성을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형태와 노출량에 따른 안전성을 봅니다.
그래서 원료 선택은 곧 규제 전략이 됩니다. 시장성이 좋아 보이는 전통 원료라도, 식물 종 동정이 복잡하거나 독성 성분 논란이 있거나 EU 섭취 이력이 부족하면 수출 전략에서는 큰 부담이 됩니다. 반대로 덜 전통적으로 보이더라도 성분이 명확하고 독성 자료를 만들기 쉬운 원료가 규제상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할 점
벨기에 사건을 “중국의 문제”로만 보면 배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더 중요한 교훈은 어느 나라 전통이든, 전통 명칭과 실제 화학 성분 사이에는 틈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정 독성 성분이 문제라면, 그 물질이 중국 전통에 속하는지, 한국 전통에 속하는지, 유럽 전통에 속하는지는 안전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아리스톨로킥산 또는 관련 독성 우려가 있는 약재에 대한 규제와 경고가 뒤늦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유럽의 규제가 단순한 문화적 차별이 아니라, 실제 피해 경험에 기반한 위험 관리였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모든 전통 원료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통 원료를 국제 시장에서 제대로 인정받게 하려면, 전통 사용 이력과 현대 안전성 자료를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정리
“수천 년 먹어왔다”는 말은 출발점으로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규제에서는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전통 사용 이력은 안전성 평가의 한 자료일 뿐이고, 제품 형태, 농축도, 섭취량, 대상 소비자, 독성 성분, 제조 표준화가 함께 검토되어야 합니다.
벨기에 한약 신장병 사건은 이 원칙을 가장 강하게 보여 준 사례입니다. 전통 이름으로 유통된 약재가 실제로는 다른 식물이었고, 그 식물에 포함된 아리스톨로킥산이 치명적인 신장 독성과 암 위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 유럽의 규제 논리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오래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려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사용했는지 문서와 과학 자료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전통과 과학의 대립이 아닙니다. 전통을 현대 시장에 올리려면, 전통의 언어를 규제와 독성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 번역을 하지 못하면, 해외 규제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문헌
- Grollman AP, Marcus DM. Global hazards of herbal remedies: lessons from Aristolochia. EMBO Reports. 2016;17(5):619-625. https://doi.org/10.15252/embr.201642375
- Zhang HM, et al. Recognition of the toxicity of aristolochic acid. Journal of Clinical Pharmacy and Therapeutics. 2019. https://doi.org/10.1111/jcpt.12789
- Zhou Q, et al. Overview of aristolochic acid nephropathy: an update. Kidney Research and Clinical Practice. 2023;42(5):579-587. https://doi.org/10.23876/j.krcp.22.211
- European Medicines Agency. Public statement on the risks associated with the use of herbal products containing Aristolochia species. https://www.ema.europa.eu/en/documents/scientific-guideline/public-statement-risks-associated-use-herbal-products-containing-aristolochia-species_en.pdf
- European Commission. Traditional herbal medicinal products. Directive 2004/24/EC.
- European Commission. Novel Food Regulation. Regulation (EU) 2015/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