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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신피로 논쟁과 만성피로의 신경·면역·내분비적 이해

발행: 2026-01-31 · 최종 업데이트: 2026-01-31

부신피로 개념이 왜 질환으로 인정되지 않는지 살펴보고, HPA 축, 자율신경계, 신경염증 관점에서 만성피로를 과학적으로 재해석합니다.

부신피로는 실재하는 질환인가

‘부신피로(adrenal fatigue)’라는 용어는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지만, 먼저 명확히 해야 할 점은 이 용어가 현재 의학적으로 인정된 질병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신피로는 만성 스트레스에 노출된 이후 극심한 피로, 무기력, 집중력 저하, 수면 장애 등이 나타나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으며, 이 과정에서 부신에서 분비되는 코르티솔(cortisol)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코르티솔은 대표적인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혈당 유지, 면역 반응 조절, 혈압 유지, 각성 상태 조절 등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코르티솔 분비 이상 → 전신 피로”라는 가설은 생리학적으로 전혀 엉뚱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직관적으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의학에서 질병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가설의 타당성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복적으로 재현 가능한 생리적 이상과 객관적 지표가 필요합니다.

부신피로가 질환으로 인정되지 않는 과학적 이유

부신피로 개념이 공식 질환으로 채택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피로 증상과 부신 호르몬 분비 사이에 일관된 상관관계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연구에서 만성 피로를 호소하는 집단과 건강한 대조군 사이의 혈중 코르티솔 농도, 일중 분비 리듬(diurnal rhythm), 자극 검사 결과를 비교했지만, 질병으로 규정할 만큼 일관된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Cadegiani와 Kater의 체계적 문헌 고찰에서는, 부신피로를 지지할 만한 내분비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오히려 피로 증상은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비특이적 증상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현재 내분비학계와 주요 학회에서는 ‘부신피로’라는 진단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부신 자체가 피로해진다거나 기능이 소진된다는 개념은 현재의 생리학적 이해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임상에서 관찰되는 ‘이상’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임상 현장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명확한 부신 기능 저하(예: 애디슨병)는 아니지만,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고, 회복이 더딘 양상을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근 주목받는 개념이 바로 HPA 축(Hypothalamic–Pituitary–Adrenal axis)입니다. HPA 축은 단순히 부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 시상하부

  • 뇌하수체

  • 부신

으로 이어지는 중추 신경–내분비 조절 시스템 전체를 의미합니다.

만성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이 축의 “호르몬 분비량”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조절 리듬의 변화, 민감도 저하, 피드백 시스템의 왜곡입니다. 즉, 혈중 코르티솔 수치가 정상 범위에 있더라도,

  • 아침 각성 반응이 둔화되거나

  • 스트레스 자극에 대한 반응이 과도하거나

  • 회복 단계에서 제대로 억제되지 않는

상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부신피로’가 아니라 ‘HPA 축 조절 장애’로 설명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훨씬 정확합니다.

만성피로증후군은 왜 인정되었는가

흥미롭게도, **만성피로증후군(CFS)**은 명확한 단일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질환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만성피로증후군이 특정 장기 이상을 가정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임상 증상군을 중심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성피로증후군은

  • 휴식으로 회복되지 않는 피로

  • 활동 후 증상의 악화(post-exertional malaise)

  • 인지 기능 저하

  • 수면 장애

등이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는 경우 진단됩니다. 이는 부신피로처럼 “원인을 가정한 질환”이 아니라, 현상 기반의 진단 체계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자율신경계 이상과 피로의 연결

최근 연구에서는 만성피로증후군 환자 중 상당수에서 자율신경계 이상이 동반된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율신경계는 심박수, 혈압, 체온, 위장관 운동 등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자동 조절 기능을 담당하며, 스트레스 반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율신경계 조절이 무너지면,

  • 지속적인 피로

  • 어지럼

  • 수면 질 저하

  • 소화 장애

등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만성피로증후군, 자율신경실조증, HPA 축 기능 이상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채 일부 병태생리를 공유하는 상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면역계와 신경계: 피로의 또 다른 축

여기에 최근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것이 **면역–신경 염증(neuroinflammation)**입니다. 만성피로증후군과 포스트 코로나 증후군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특징 중 하나는, 말초 감염 이후에도 신경계 염증 반응이 장기간 지속된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현재 만성피로증후군은
**ME/CFS(Myalgic Encephalomyelitis/Chronic Fatigue Syndrome)**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며, 단순한 피로 질환이 아니라 중추 신경계 질환의 성격을 가진다는 해석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시상하부는 면역 신호와 신경 신호가 교차하는 핵심 부위이며, 이곳이 영향을 받을 경우 HPA 축과 자율신경계 모두에 연쇄적인 이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과거 ‘부신피로’로 설명되던 현상 중 일부는, 이러한 신경–면역–내분비 축의 이상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이 논의를 가속화한 이유

코로나19 이후 만성 피로, 인지 저하, 수면 장애를 호소하는 환자가 급증하면서, 이 논의는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SARS-CoV-2는 스파이크 단백질을 통해 TLR4를 자극할 수 있으며, 이는 면역세포뿐 아니라 신경세포에서도 염증 반응을 유도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TLR4는 감염 방어에 필수적인 수용체이기 때문에 무작정 차단할 수는 없지만, 이 수용체를 통해 면역 반응이 신경계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은 분명해졌습니다. 이는 피로가 단순한 에너지 부족이 아니라, 면역 신호에 의해 조절되는 생리적 상태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정리

현재의 과학적 이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부신피로는 질병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 그러나 일부 만성 피로 증상은
    HPA 축 조절 이상, 자율신경계 기능 장애, 신경 염증, 면역 신호 이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 만성피로증후군과 포스트 코로나 증후군은 이 연결 고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특정 용어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피로를 신경–면역–내분비의 통합적 문제로 이해하고, 증상 기반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