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항암제를 개발하는 사람들은 암치료제 개발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을 했습니다. 하지만 항암제 개발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힘든 과정의 하나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설명한 책은 아마도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1850년대 중반에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면화가 영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때문에 방직산업이 발달하게 되고 그 결과 관련 산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이때, 1774년 면화 제품은 영국 총 수출량의 6%였지만, 1850년대에는 50%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직물 염색기술이 발달하고 염색산업이 호황을 맞이합니다. 직물을 만들어내는 방직기술은 기기적인 발전이므로 쉽게 발달했지만 염색산업은 화학산업이므로 쉽게 발달하기 어렵고, 당시의 기술은 아직 초보 수준이었습니다. 당시는 천연물을 이용해서 염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1856년 18세의 학생이었던 윌리엄 퍼킨은 질산과 벤젠을 끓이다가 예상치 않은 색깔이 있는 화학물질을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색이 있는 물질이 있다면 이 물질로 염색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면화조각을 담궈봤는데, 이때 염색이 될 뿐만 아니라 물이 빠지거나 번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아닐린 모브라고 했습니다. 이 물질을 선도물질로 그것을 이용해서 다양한 염료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닐린 영국에서 개발되었지만, 이 기술이 더욱 필요한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은 영국과는 달리 천연 염료를 제공해줄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첨단산업이 직물산업에서 영국과 경쟁하기 위해서 우수한 염료가 절실했습니다.
독일은 더 우수하고 선명한 염료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때 나온 염료가 알리자린 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염료를 연구하는 연구실에는 수 많은 염료가 시약장에 놓여있었지만, 이것을 의약품으로 연결시킬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파울 에를리히의 세포 염색
1878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 살었던 24살의 의대생인 파울 에를리히 학위 논문으로 옷을 염색하는 물질로 세포를 염색해 보겠다는 아이디어를 떠 올렸습니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본 사람은 세포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세포만이라도 잘 보이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염색약은 세포를 전체를 염색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만 염색을 시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882년에는 그는 코흐와 같이 연구하면서 마이코박테리아(항산균)을 염색시킬 시약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연구를 지속하면서 자연계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특정한 화학물질은 특정한 물질과만 선택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염료가 그랬고, 당시 독소와 항독소에 대한 개념도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동료에게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과 결합하는 물질을 이용해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화학요법”의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입니다.
그는 브루스 파동편모충을 쥐와 토끼에게 감염시키고 이를 치료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수백가지 실험한 결과 선홍색의 염료 하나가 이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에 트립판 레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시작이었고, 그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만한 화학물질을 찾아내서 당시 꽤 난치병으로 알려진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606번 화학물질이라고 말한 그 물질은 후에 구원이라는 Salvation이라는 단어에서 이름을 따라서 살바르산 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정말 불치병이라고 생각된 매독을 고치자 에를리히는 마지막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 대 천재는 그 이후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염색약을 찾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노력을 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합니다.
당시 많은 화학물질들이 질병을 하나 하나 극복한 것과는 달리 암은 절대로 암세포만 염색되는 물질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파울 에릴리히는 결국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이미 염색산업은 한물 갔고, 전쟁을 위해서 염색공장은 겨자가스를 만드는 공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942년 연합군의 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일
1943년 12월 2일 독일 나치 공군은 이탈리아 남부 바리의 외곽에 있는 한 항구에 모여 있는 미국 함대를 폭격했습니다. 이 폭격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폭격한 함대의 하나에 만약을 위해서 70톤의 겨자 가스가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겨자 가스를 담은 하비 호가 폭발하고 겨자 가스가 항구도시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겨자 가스가 바리 항구에 퍼지면서 구조된 617명 중 83명이 일주일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몇 개월에 걸쳐 약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연합국 측은 다친 군인과 선원들을 신속하게 각국으로 후송하고 의학 전문가를 비밀리에 항공편으로 날아와서 죽은 사람을 부검했습니다. 부검 결과 상당히 특이했는데, 혈액에서 백혈구가 거의 사라졌고, 골수도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이 물질이 골수세포를 표적으로 하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이것은 파울 에를리히가 그렇게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백혈구만 선택적으로 죽일 수 있는 화학물질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한 림프종에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사람에게 사용한 결과 동물에서 처럼 사람에게서도 암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항암제의 시작이고 어떤 의미로 많은 대체의학자들이 항암제는 독약이라는 말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이 겨자가스의 문제는 일시적으로는 암을 완화시키지만 거의 다 재발했다는 것입니다.
항암제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개발된 것이지 이것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이 연구 결과는 전쟁이 끝나고 발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통찰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항암제는 DNA와 RNA의 합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구체를 이용해서 개발되었습니다.